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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지에서의 하루밤
글쓴이 : 로맨스그레이     조회 : 818     작성일 : 2017-03-23 22:41:20
***또다른 취미이야기(월척에서 담아온 글)***

낚시 이야기가 나오면 친구는 술부터 챙겼다.
"세상에서 가장 맛좋은 술은
낚시터에서 친구와 함께 마시는 술이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곤 하면서...
낚시터에서의 술은
친구에게 낚싯대 힘차게 휘두르게 하는 활력이었고
재미있는 이야기 나오게 하는 도깨비 방망이였으며
웃음소리 키우는 활성 비타민이었다.

친구는 월곡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출조 때마다의 빈 바구니가 그를 실망시키기도 했겠지만
어느 핸가의 늦가을
취중에 물 속으로 굴러 떨어져 낚시도 못하고
복날 개 떨듯이 떨면서
여러 친구들에게 핀잔만 듣던 생각이 새삼스럽게 떠올라
의식적으로 그곳을 피하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얼마 전 출조지를 고르던 중 월곡지 얘기가 나왔을 때도
친구는 기를 쓰고 반대했었다.
'하고많은 저수지 두고 하필이면 영양가 없는 월곡지로 가서
누구 엿먹일 일 있냐고...'
그러나 나는 월곡지가 꼭 한번 가고 싶었다.
동양화(東洋畵) 처럼 이어지는 산세(山勢)에 맑디맑은 모습으로 놓여진 낚시터는
웬만한 붕어 한 마리만 걸어도 깊은 수심에서 좌우로 휘저어 놓는 것이
사람 깜빡 죽여주는 손맛이어서...
어느 해 여름이던가 중상류 논배미 옆 수초 밭에서
새우미끼에 연신 이어지던 입질이며,
깊은 밤 배 출출할 때 현장에서 잡은 새우 넣고 끓여먹던 새우탕 면과 소주한잔이
못내 입맛 다시게 하는 추억으로 남아 있기에,
기회가 오기만 벼르다가 비로소 오늘에야
늘 따르는 후배와 코드를 맞추고 출발하기로 한 오후 다섯 시,
마치 신내린 것처럼 어떻게 알고 친구가 드리닥친 것이다.

얼굴빛이 별로 좋지 않은 친구는
엉뚱하게 아내에게 한마디 퍼붓는다.
"제수씨 저늠 낼부터 밥 주지 맛쇼!
나 띠어놓고 낚시 가서 먼 엉뚱 헌 짓거리 헐라고 그런지 모르것소.
나야 술 한잔 묵으먼 그만이지만
저늠은 술도 잘 안 묵고 엉뚱 헌 생각만 허는 놈 인께 조심해야 쓰요!
글고 너 후배!
술 먹을 때는 나만 찾더니
낚시 할 때는 딴 늠하고 눈이 맞어?
앞으론 낚시터서건 술집에서건 좀 떨어져 앉자!"

입으론 쉼 없이 시비하면서도 내 낚시 가방 들어 제 차에 싣고
빠진 것 없는지 둘러보는 세심함까지 보인다.
오늘은 안전벨트 단단히 매야한다.
심사 틀린 저 친구 또 얼마나 밟아 댈지 모르니까!

영암(靈巖)에서 옴천 넘어가는 구절양장(九折羊腸) 고갯길,
허우적거리며 기를 쓰고 넘던 차가 막 한숨 돌리고
삼백여 미터 쉬운 걸음으로 내려가려나?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목욕이라도 하고있을 것 같은
깊고 맑은 모습으로 월곡지는 그 고운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심호흡 한번 크게 하고 예의 그 포인트에 도착했을 때,
아뿔싸!
배수기의 시련은 깊은 계곡 월곡지에도 어김없이 찾아와 있었다.
계속되는 배수는 포인트를 바꾸어 버렸고,
우왕좌왕하던 우리가 자리한곳은 최상류 다리 못 미쳐 맨바닥 포인트.
입싸고 성격 급하지만 정 많은 친구는 우릴 위해 커피 물부터 올린다.

분위기는 죽였지만 입질은 쉬 오지 않았다.
새우는 벌써 두 시간째 총독부 말뚝이었고
콩알에만 피라미와 살치가 사람 놀래키는 방정맞은 입질로 간간이 끌려나오고,
붕어라고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녀석들만 엉겁결에 같이 섞여와
'애들은 가라'고 돌려보내는 일만 반복 될 뿐...
아예 지렁이 끼워 빠가사리 열심히 잡아내던 친구마저 지쳤는지
노골적으로 술 타작이 시작되고 착한 후배는 고약한 선배 술잔 채우기에 바쁘다.
자정을 넘겼을까?
골백번도 더 들은 친구의 취중넋두리에 잠깐 졸았던가 보다.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몇 줄기 나지 않은 수초 옆 낮은 곳으로
비스듬하게 쳐두었던 세 칸 대의 케미가 불쑥 들고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잘못 본 건 아닐까?
눈을 꼭 감았다 다시 떠보았는데도 여전히 찌는 움직이고 있었다.
솟아오르던 찌는 이번에는 옆 걸음까지 친다.
얼레, 저건 새우미낀데...!
수 십 년 된 묵은 낚시꾼의 관록은 이럴 때 나타난다.
번개같은 챔 질 뒤에 붕어의 머리조차 한 타임에 앞쪽으로 돌려 세워버리는
일타이피(一打二皮)의 순간동작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대단한 속기였다.
어지간한 놈들은 쪽도 못쓰고 달려나오는...
헌데 이번 녀석은 뭔가 달랐다.
돌려놓은 머리를 바로 되 제쳐 버리고
한 이미터쯤은 치고 나가 버리는
대단한 테크니션 이었다.
그뿐인가 강력한 파워로 좌측을 향해 쏜살같이 삐지는 폼이
그래도 붕어 사는 동네에서는 힘 꼴이나 쓰는 장골(壯骨)인 듯 싶었다.
그러나 오늘밤 녀석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내가 누구던가?
낚시대 하나로 쉰 여 해 동안 주유천하(周遊天下) 하며
북으론 파로호(破虜湖)에서 남으론 추자도(楸子島)까지
온갖 낚시장르 섭렵한, 조금 유식한 문자로 '캐리어 피셔' 아니던가! ㅋ
수심은 깊었다. 장애물도 없었다.
내겐 행운이었지만 녀석에겐 불행이 따랐을까?
그날 따라 채비조차 튼튼했었다.
'떨어져라! 떨어져라!'
술 취한 친구의 애절한 응원에도 불구하고
좌로 끌고 우로 당기는 내 손 풀이에 녹초 된 붕어는
입만 동동 띄운 체 끌려나와
그 날밤의 유일한 전리품(戰利品)으로 남았다
산세 좋은 맑은 물에 자란 녀석이기 때문일까
턱걸이에 불과한 크기였는데도 쓰는 힘은
내가 만난 어느 붕어에게도 뒤지지 않는 천하장사였다.

월곡지(月谷池)
이름 모를 밤새소리 애처로이 들리는 그 아름다운 낚시터는
아직은 거친 손들에 몸 버리지 않은 천연의 자태로 거기 다소곳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내게 또다시 가슴 벅찬 손맛을 안겨주었다.
이제 시간이 지나고 언젠가 불현듯 그리움에 이 월곡지를 다시 찾았을 때
더도 말고 오늘의 이 모습 이 물빛 그대로만 지키고 있어주길 간절히 기도 할 때,
술 취한 친구의 허풍 섞인 무용담(武勇談)만이 술 냄새 섞인 체
그 날밤 내내 저수지 수면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어느 해 여름 되던 길목에서 겪은 이야기를
어유당(魚有堂)올림
허경천
어느곳에서도 뛰어난 사람은 있는 법.....문단에 등록된 작가지만 글로 밥먹는 이가 아닌데 낚시얘기론 어떤 뛰어난 문인보다 사람을 빠지게하는 글재주를 지난 사람/월척의 어유당 2017-03-23 22:4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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