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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풀의 悲歌[담아온 글]
글쓴이 : 로맨스그레이     조회 : 882     작성일 : 2018-06-15 20:07:16
형님은 한줌 억새풀의 흔들림이 되어
살아생전에 즐겨 찾던 낚시터 옆 언덕빼기에
싸늘한 가을 바람으로 잠들어 있었다.
강산이 변해도 네 번은 더 변했을 세월을
풍우(風雨)에 희미해진 흔적(痕跡)으로 기억 지으며...
그리고 낚싯대 같이 담그던 까까머리 소년은
이제 반백(半白)의 장년(長年)이 되어 형님을 먼저 보내고 난
사십 여 년의 유한(有恨)했던 세월을 낚싯줄에 묶어
그 추억의 한가운데로 찌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내게 고종사촌(姑從四寸)뻘 된 그 형님을
내가 아직도 가슴속의 따뜻한 온기(溫氣)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미약하지만 낚시에 대한 최초의 이론(理論)과
평생을 두고 가슴에 심지 돋우어야 할 문학(文學)에의
첫 꿈을 심어준 인연(因緣)에 대한 연민(憐愍) 때문인 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
인간이 얼마만큼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사랑을 할 수 있는가를
그 형님과 그 형님을 사랑했던 한 여인의
순애보(殉愛譜)를 통해서 배웠기 때문이리라!
지금의 사랑 세태(世態)에선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찌가 솟는다.
찌 솟음의 길이는 붕어의 호흡(呼吸)만큼 이어지고,
그 호흡의 길이 만큼 내 긴장도 길어진다.
더구나 수심 재서 찌 맞추고
달디단 담배 한 모금과 함께 받은 첫 입질은
모든 꾼 들에게 순간 세상의 갖은 시름을 잊게 만든다.
오직 솟는 찌 끝에 모아지는 기대와 설레임만
파문(波紋)처럼 퍼져 나갈 뿐...
긴 시간을 두고 연습해왔던
찌의 부상(浮上)에 감응(感應)하는 챔 질은
녹녹치 않은 붕어의 저항을 줄과 대를 통해 이야기 듣게 해주고
줄의 직선(直線)과 대의 곡선(曲線)이 만들어 내는 탄력(彈力)의 역학(力學)은
붕어의 입과 눈과 비늘과 꼬리로 이어지는
손맛이라 불리는 힘 뒤에
사실은 별 의미 없는 길이를 가늠해 보게 한다.
손맛 보러 간다던 사람들은 꼭 그렇게
길이를 따지는 우(愚)를 범하고 만다.
내가 오늘 잡은 첫 수의 붕어를 여덟 치라고 가늠하듯이...




형님은 참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리고 내가 살던 동네 인근에서
최초로 S대 법대에 진학한 수재였다.
나와 일곱 살 터울이었던 형님은 내가 꿈꾸던 이상(理想)이었고
내가 가고 싶던 길을 가는 선도자(先導者)였다.
완고하신 조부의 성화에 못 이겨 법학(法學)을 택했던 형님의 가슴에는
언제나 문학(文學)에의 열망이 뒤끓고 있었고
그 시절 중학생이었던 난
형님을 통해서 '헷세'나 '톨스토이' '헤밍웨이'를 알았고
'미당(未堂)'과 '영랑(永郞)' 또 '릴케'와 '베를넨느'의 운문(韻文)을 접했다.
방학 때면 내려와 낚시터에서 낭만과 사색을 탐닉(耽溺)하던 형님...
그에게는 사랑하던 여인이 있었고
함초롬히 핀 박꽃처럼 아름다웠던 그 여인은
산지기 집 딸로 태어났다는 책임 없는 원죄(原罪) 때문에
조부님의 반상(班常)이란 개념(槪念)의 덫에 걸려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 목이 메이고 있었다.
몇 번인가 난 그들에게 연애편지를 전달해 주는
사랑의 메신저가 되어 둘 사이를 오간 적이 있었고.
애달픈 그들의 사랑은 마치 가을 산의 옻나무 단풍처럼
그렇게 붉고 처연(悽然)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해질녘 저수지 한 모퉁이에서
낙조(落照)에 물든 수면위로 붉은 톱을 치켜들며
솟는 찌를 본적이 있는가?
제색(綠色)을 반쯤 잃어버린 뗏장수초 언저리에서
두 번째 입질은 그런 화사한 몸짓으로 내게 다가 왔다.
지난 세월을 반추(反追(芻))하며 분실된 시공(時空)을 넘나들던 내 감각들은
그 순간 손끝에서 꾼의 예기(銳氣)로 모아지고
한 마디 한마디 높아지는 찌를 보며 내 눈은
허(虛)와 실(實)의 교차점(交叉點)을 찾는다.
그리고 문득
고기의 크기는 찌 올림의 속도에 반비례(反比例)함을 생각해 내고
느린 솟음에 더욱 경직(硬直)된 손짓으로
긴장의 정점(頂點)무렵 대를 당겨
바늘이 붕어의 윗입술에 꽂히는 소리를 감각으로 듣는다.
한사코 돌아서기를 거부하는 붕어를 달래며
손끝으로 전달되는 인력(引力)의 짜릿함이 안도감으로 바뀔 때
비로소 그 모습을 보고
그렇지 말자던 맹세도 헛되이
붕어의 옆줄 따라 눈어림의 자를 다시 대고 만다.
턱거리는 될 것 같다!
인습(因襲)이란 이토록 끊기 어려운 것이었던가?
아무런 의미 없는 것에도 이토록 집착하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

형님의 죽음은 내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사람의 똑똑함과 세상을 살아나가는 힘은 전혀 별개였던가 보다.
조부(祖父)의 완고(完固)함과 여인의 사랑사이에서 번민(煩悶)하던 형님은
'이상(李箱)'도 '카프카'도 그리고 형님이 그렇게나 아꼈던
스스로 만든 오죽(烏竹)의 낚싯대도 스스럼없이 팽개치고
여인에게 보내는 한 장의 연서(戀書)만을 남긴 체
스물 세 살의 짧았던 세상과의 인연을 마감했다.


지렁이 낚시는 고기와의 놀음이 빈번해 좋고
떡밥낚시는 찌 오름이 아름다워 좋으며
새우낚시는 사색(思索)의 시간이 길어 좋다.
이제 노을이 지고 찌톱의 붉은빛이 검은색으로 비칠 때
나는 찌불을 끼워야 한다.
어둠을 읽는 일에 서툰 나는 찌불을 밝히고
그것을 통해 절연(絶緣)된 세상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처럼 새우를 매단 날은
초점 잃은 눈빛으로 푸른 찌불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을 것이며
잃어버린 옛 이야기들을 기억해 낼 것이다.
그것 또한 비린내 맡고 낚시 즐기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特權)이 아니던가?



몇 해 전 여름
난 이 낚시터를 찾은 적이 있었다.
비 내리기 전의 보랏빛 우울함이 저수지를 물들이고 있었고
그날 따라 잦은 입질을 보여주던 씨알 좋은 붕어에 취해
시작된 빗방울 마다않고 손맛을 만끽(滿喫)하고 있을 때었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애절(哀切)한 울음소리가 있었다.

'경덕'아...! '경덕'아....!

억새풀 무성히 자란 작은 무덤 가에서 산발(散髮)한 여인하나가
애절한 울음소리로 누군가를 부르며 절규(絶糾)하고 있었다.
아스라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설지 않은 이름과
폐부(肺腑)를 도려내듯이 통곡하는 여인의 모습을
조금은 송연(悚然)한 가슴으로 바라보던 나는 소스라 칠 듯 놀랐다.
그건 형님의 무덤이었다.
다스려 주는 사람 없어 무너지고 흘러내려 비록 억새 밭이 되었지만
분명 그곳은 형님이 잠든 곳이었고
흐트러진 옷차림과 산발한 머리를 한 채
형님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는 여인은
살아생전에 형님이 그토록 이나 사랑했던
박꽃을 닮아 눈부시도록 희고 아름다웠던 여인
산지기 집 딸이었다.
그리고 바람결에 전설(傳說)처럼 들려오던 그 얘기가 사실임을 짐작했다.
흐린 날이면 늘 저렇게 찾아와 피 토(吐)하는 절규(絶糾)를 한다던!
눈물이 맺혀와 찌를 볼 수가 없었다.
얼마나 한 맺힌 사랑이었으면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을 차마 죽지 못하고 모진목숨 부지한 채
실성(失性)한 여인이 되어
비 내리는 날이면 사랑했던 사람의 무덤 가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을까!
누가 감히 피를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그날 난 물고기 담긴 살림망을 물가에 매달아 둔 것도 잊어버리고
비련(悲戀)의 통곡소리를 가슴으로 들으며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련한 기억을 이끌어내느라 흐릿해진 내 동공(瞳孔)을 통해
비스듬히 쳐 두었던 세 칸 반대의 찌가 오른다.
조금 전 입질도 놓친 체 그저 넋 놓고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도
붕어는 다가오는 월동간(越冬間)의 안주(安住)를 위해
노림수를 품고있는 새우를 탐(貪)했었나 보다.
한 점 찌불은 발광(發光)의 반경(半徑)을 점점 넓히려 들고
나는 비로소 손맛을 탐닉하는 낚시꾼으로 돌아온다.
느리게 솟던 찌는
가끔 그렇듯이 옆 걸음 질 쳐 대어의 입질임을 말해주고
더 큰 힘의 크기를 원하는 나는
말아 쥔 손잡이에 긴장의 땀을 적신다.
하나, 둘, 셋, 호흡으로 세던 숫자를 멈추는 순간
빠르고 강하게 거두어 드린 대 끝에는 생각보다 강한 저항이 실려있다.
바늘에서 목줄로 원줄에서 초리로 장비(裝備)의 안위(安危)가 순식간에 뇌리를 스치고
안심한 내가 낚싯대에 힘의 크기를 더할 때
붕어는 한사코 수초를 향하고
내 낚싯대는 그 저항(抵抗)의 힘을 빗대어 뭍을 향해 눕는다.

먼 곳으로부터 뒤집어 지기를 몇 번이던가?
생각보다 길었던 박빙(薄氷)의 줄다리기 끝에 저항을 포기한 채
이젠 희부연 자태(姿態)로
배를 드러내 보이며 발 아래까지 끌려나오던 붕어는
원줄을 잡고 무게를 가늠하는 무방비(無防備)의 일순간(一瞬間)
최후의 바늘털이 한번으로 목줄을 떨군 채
제가 살던 수초를 향해 꼬리 짓 두어 번으로 사라져 가버렸다.
가을밤의 차가운 기온에서도
등줄기 땀이 고이도록 실랑이했던 대어를 놓친 나는 허무하다.
그리고 손맛을 즐긴다는 미명하(美名下)에
또 스스로를 기만(欺瞞)했음을 생각하고 쓴웃음을 짓는다.
나는 보다 긴 체장(體長)을 가진
붕어의 소유(所有)를 원 했던 것이다.

차마 쥐어보지 못하고 가버린 허무함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아쉬움이
후일(後日) 붕어에 대한 더 큰 열망(熱望)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맺을 수 없기에 더 아름다운 첫사랑같이....




떨치고 나간 붕어를
나는 아마 두 뼘을 넘어선 대물붕어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가끔 만나는 조우(釣友)들과의 술자리에서
오짜를 터뜨렸노라고 두고두고 얘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치 형님의 못 이룬 연정(戀情)처럼
오랜 시간동안 가슴에서 놓지 못할 것이다.
이렇듯 맺지 못하고 가버린 것은 모두가 아쉬움으로 남는가 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그리움이라고 이름 지어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가 보다!

무서리 내리던 그날 밤새
대물붕어와 형님은 그리움이 되어 작은 저수지 가를 맴돌고 있었고
억새는 밤바람에,
흐느끼는 여인의 작은 어깨처럼 그렇게 흔들리고 있었다.

*** 끝.

어느 늦가을 옛 추억 서린
영산포 근교의 어느 소류지를 다녀와서...

어유당(魚有堂) 올림
허경천
낚시,오디오,바둑,골프등 다양한 취미를 가졌던 내가 많은 관련사이트를 섭렵하며 접한 취미를 주제로 한 많은 글중 단연 백미로 꼽은 글,프로문인활동은 않아도 문단데뷔는 하였다는 얘기가 듣기기도하지만 어유당이란 필명으로 낚시사이트에 올린 글들 하나가 하나가 모두 뛰어난 문장과 유려한 필치로 그려진 주옥같은 글들이다. 2018-06-19 20: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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