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추억의 멜로듸
글쓴이 : 로맨스그레이     조회 : 1,006     작성일 : 2018-07-23 18:00:44
경쾌한.jpg
(Size:217904 Width:787 Height:757)

열어논 창문밖으로 보이는 이름모를 넓은 잎 가지사이로 지는해가 바람에 일렁인다.
폭염주의보를 알리는 군청 차의 스피커에서 들리는 아가씨의 목소리도
더위를 먹은듯하다.

우리집에는 에어컨이 없다.
고희를 코앞에 둔 이 나이까지 집에 에어컨을 들여본적이 없다.
군생활을 할때는 에어컨을 들일 경제적 여건이 안되어서였고
에어컨을 들일만한 여유가 있을때에는 사는 집이 너무 시원하여
한여름에도 이불로 배를 덮어야할 정도여서 에어컨을
들일 생각을 아예 하지않았었다.

지금 사는 집도 바다에서 가까운데다 바다바람을 막는
산이나 큰 건물이 없고 우리집은 가장 동쪽면이어서
동쪽이 트여있어 창을 열어놓으면 남풍이 불면 남쪽에서 동쪽으로
열어논 문으로 바람이 시원스레 빠져나가고 동풍이 불면
동쪽에서 부는 바람이 내 컴퓨터를 논 남쪽문으로 솔솔 빠져나가다보니
엔간한 더위엔 덥다는 느낌을 못 느끼니 에어컨 생각을
아예 하지않고 8년을 넘게 살았다.

올해 일찍은 휴가를 다녀와서 이번 여름은 고스란히
집에서 더위와 싸워야할 판인데 요 며칠 하두 더워서
오늘은 온도계를 보니 오전 11시 기온이 34도를 가리키더니
다섯시를 넘긴 이 시간에도 여전히 식을줄을 모른다.

어제는 옥션에 에어컨을 대신할 물건을 한시간 넘게
검색을 하였는데 낚시사이트를 기웃거리다 충전용 대형선풍기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이다.

그놈 한대면 더위는 이길만하고 지난해와 올 피서여행을
낚시터에서 밤을 세운터여서 집사람이 피서와서
집에서보다 더 고생을 하였다고 푸념을 하여서
충전용 선풍기 이름이GEEK라는 이녀석 하나이면
되겠다싶어 옥션에서 찾아보니 가격이 만만찮다
비슷하게 생긴 스위스밀리터리라는 회사것은 18만원정도
GEEK는 19만원이다.

에어컨은 기기값보다 운영비가 워낙 많이 들어서
집에 들이기가 껄끄럽고 에어컨 한달 사용하는
돈이면 GEEK을 사면되겠다고 벼르고 있는중이다.

그 사이라도 더위가 물러가면 잊어버리겠지만
이번 여름 더위는 쉽사리 물러설것같지않은 예사롭지않은
조짐을 보이고 있어서 GEEK을 들이게 될거란 생각이다.

선풍기를 끼고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한다.조금만 움직이면 땀이 나고 집중도
되지않아 작업능률이 현저히 떨어진다.

방안에 들어가 TV를 보고싶은 생각이 나지않아
오랫만에 마음먹고 음악을 들어보자하고 새로들인
파워앰프에 불을 지폈다.

JBL파워가 자리하였던 곳에 새로 들어앉은 파워를
예열시키고 어떤 음악을 들을까 음반을 찾는데

새빨간 바탕에 대밭에서 포효하는 호랑이 한마리가
금방이라도 뛰쳐나올듯한 그림을 한 음반쟈켓이 내눈길을 사로잡는다.

곧 바로 내 기억은 40여년을 건너뛰어 양구
문화여인숙 안방으로 자리한다.

소위임관하여 처음 부임지가 강원도 위도상으로
38선이북인 양구였는데 소위들은 거의 대부분
최전방행이지만 우리는 부관병과로 임관을
하여 소위도 최말단부대가 사단사령부였다.

그래서 하숙집을 찾은게 양구시내 문화여인숙이었다.

몸집이 넉넉한 아줌마와 목소리가 걸걸한 주인아저씨
공군에 입대한 아들과 서울에서 여고를 다니는 딸
그리고 중학교에 다녔던 둘째딸 초등학교를 다녔던
막내아들이 가족이었던 하숙집 안방에는
외제 장전축이 떡 하니 놓여있었는데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전 코흘리게 철부지때부터 왠지 우리가요를 좋아
하였지만 그 시절 우리 고향에는
음악을 들을만한 수단이 없었다.

그 당시 노래를 들을수 있는 방법은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유일하였었는데 60년대 중반 일제 소니사에서
만든 손바닥에 들어오는 소니빵떡이라는 조그만
트랜지스터라디오를 고향중학교에 교편을 잡고있었던 형님이
갖고 있었는데 방학이 되어 시골집에 오시면
나는 거기에서 나오는 음악이나 연속극을 듣고싶어
안달을 하였는데 그소리를 들을수있는 호강을 할수있는 시간은
가족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는 아침과 저녁시간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도 동요음반을 보는 데로 수집하는 것도
그 당시에 호롱불켜진 안방 선반위 장농위에
놓인 소니라디오에서 왼가족이 모여서 저녁먹을때 들었던 동요가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하였기 때문이다.

나의 음악에 미친 여정은 앞서도 얘기를 한바있어서
접고

문화여인숙 안방 장전축은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그 당시 나는 히타치 녹음기를 들고 다녔는데
녹음기에서 듣는 음악과 외제 장전축으로 듣는 음악을
비교할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좌우로 밀어서 여는 문을 열면
음반 이십여장이 꽃혀있었는데 궂이 그 음반가운데
대밭에서 포효하는 경음악 음반이 내 관심을 끌게한것은
유독 나는 전자올갠 음악을 좋아하였는데

고향 최고로 일잘하는 아버지를 둔 나와 내 형님은
시골 논 20여마지기를 붙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도
일이란 것을 해 보지않았다.

형님은 아예 일을 하지않았고 나는 일을 도운다는것이
여름방학이면 일주일에 한번 정도 꼴망태를 메고 나가
반나절 들과 산을 누비며 한망태기의 소꼴을 뜯어오는게
고작일 정도로 농사일은 아예 배우지를 않았다.

이는 자식에게는 등짐을 물려주지않겠다는 아버지의
모진 결심때문이었고 그 아버지의 결심과 수고로
우리 고향에서는 형님이 대학졸업한 첫번째가 되었고
그 후로 15년후에 우리옆집 초등학교 내친구가 영남대학교를
들어갔을 정도로 그 당시엔 파격인 다른 아버지들은
꿈도 못꿀 일을 아버지는 하셨던 것이다.

스무살이 넘도록 호미한번 안 잡았던 내가
대구에서 친구집에서 친구동생 가정교사를 하였던 나를 어머니가
찾아오셔서 군입대영장이 나왔다고하여서
입대하기전까지 딱 반년 수박농사
우리 고향은 지금은 참외가 유명하지만 그 당시에는
참외하우스 농사는 시작하지않았고 수박하우스농사를
하여서 젊은 일꾼들이 있는 가정은 모두 비닐하우스 수박농사를
하여서 농가수입을 올리든 때였다.

처음으로 아버지를 따라 수박농사를 지은 수고의 댓가로
아버지에게서 받은
그 당시 거금1만5천원(74년도 소위 초봉이 만칠천원이었다)
을 주고 청계천 조그만 오디오가게에서 산 히타치 카세트녹음기를
옆구리에 끼고 우리 가요를 즐겨 들었던 소년,
40여년전 하숙집안방에서 만지고 장전축에 걸었던 청년장교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낯익은 음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속에
거리로는 천리 시간으로는 40년이 넘는 아득한 시공을 가로지르는
추억여행을 하고있다.




목록 글쓰기 수정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