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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그 아릿한 추억의 뒤안길에는..... |
글쓴이 : 로맨스그레이 조회 : 2,022 작성일 : 2011-10-20 17:57:26 |
재생장치로 처음 음악을 접한 것은 초등학교도 입학하기전 그래도 기억이 선명한것을 보면 여섯살을 넘긴것은 분명하다.그 이전 기억은 그리 선명하지를 못하니까. 1957년 겨울즈음이 아닐까하는 어렴풋한 기억이다 당시 고향을 떠나 대구 대건고등학교에 다녔던 4촌형이 우리 동네에선 처음으로 축음기를 들고 겨울방학때 귀가를 한 것이다.당시 경북대학교를 다니던 형님을 비롯한 왼동네 청년들이 한방 모여 밤을 새워 바늘이 닳으면 댓돌에다 쓱~쓱 문질러 태엽을 신나게 감아 이해연씨의 단장의 미아리고개(간장을 녹이는 듯한 간들어진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를 비롯 우리 가요를 틀어댄 기억....... 그 기억을 시발로 어렸을 적부터 소리를 쫓아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얼굴이 두껍지도 못하였지만 노래를 듣는 데는 염체불구였다.초등학교 다닐때 우리 고향에서 비닐하우스 수박농사 기술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돈을 벌었던 형님이 쌍나팔 장전축 상호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없고 그 장전축으로 수도없이 들었던 12인 걸작집이란 40-50년대 날렸던 가수12인의 곡 이인권씨의 추억의 백마강을 비롯 박재홍씨의 나루터고향길 방태원씨의 부산행진곡등을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그형님의 새신부가 그런 나를 귀찮아하는지 어쩐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심각하게 턱을 괴고 듣곤 하였다. 그후 고향을 떠나 20여리 상거한 성주읍내에서 형님밑에서 중학교를 다니든때 방학을 맞아 고향을 찾으면 고등학교를 마친 4촌형이 추수를 하고나면 보리랑 벼를 한두말 받고 고향동네 토담벽에 덩그러니 하나씩 매달아 놓았던 스피커를 통해 우리 가요를 들려주었던 당시 유선방송 유선방송이래야 음반 100장도 채 안되는 레파토리로 리시버에 LP를 걸어 우리가요를 송출한 것이었지만....... 고향입구 몇백년을 넘긴 키큰 은행나무가 서 있는 곳에서 구멍가게를 하였던 숙모의 방 한켠에서 당시 고등학교를 다녔던 4촌 누나가 음반을 틀던 것을 시간만 나면 옆에 쭈그리고 앉아 들었던 기억들을 이어 중학교 1학년때 성주읍에서 모여관집 주인의 바람쟁이로 소문난 아버지를 두었던 김00이란 친구 이쁘장했던 그와 그의남동생 여동생 갖난쟁이 여동생 그리고 얼굴 곱기로 소문났던 하얀 얼굴이 기억나는 그 친구의 어머니..... 그때 어른들이 집을 비우고 우리끼리 있으면 언제나 울렸던 독일제 장전축 그 장전축을 통하여 지금도 내 기억에 선명한 노래는 차은희씨가 불렀던 메리켕 부두 어쩌고 한 노래 그 음반이 나오면 가격 불문코 입수할려고 하지만 그 음반을 찾을래야 찾을 수없다. 한문으로 쓰여진 쟈켙에 글씨를 읽을 수가 없어 차은흰지 차미흰지 오락 가락하였던 기억도 나고..... 그리고 바로 옆집에 살았던 성주갑부 유모씨의 아들 한반이어서 친했던 종효의 집 안방에서 간혹 울려 나왔던 극영화 장희빈의 대사들과 노래들이 궁금하였지만 그 집 안방에서 노래를 듣는 호사는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세 살든집 바로 앞집이 마침 그곳 유선방송을 하던 집이 였었고 그곳에서는 노래따라 세월따라랑 가요반세기라는 전집류에서 흘러 나왔던 고은정 이창환 유기현씨등의 대사가 기억나기도 하는등 나와 우리 가요와는 무엇인가 묘한 인연의 끈이 닿아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가요와의 뿌리 깊은 사연을 안고 스물을 넘기고서는 입대를 앞두고 한해 수박농사를 지은 보상으로 장만하였던 히다찌 카세트테이프 녹음기....... 아마 지금 이 나이까지 내게 수없이 거쳐간 물건(오디오,차,만년필,책등등)중에 히다찌카세트 녹음기만큼 내게 사랑받은 물건은 없었을 것이다 71년 7월 어느날 서울의 황학동 어느 허름한 중고 오디오가게에서 구입한 그 기기는 즐길거리라고는 라디오와 책밖에 없는 시골청년에겐 지금의 컴퓨터와도 비교 못할 최상의 놀이감이었다.밤낮을 두고 내 옆을 떠나지 않았고 놀러 갈때면 항상 들고 다녔다 노래 잘 부르던 친구, 나훈아와 백년설씨,박재홍씨의 노래를 구성지게 잘 불렀던 지금은 목사를 하고있는 친구와 늘 함께 다니며 같이 따라 불렀던 숳한 노래들....... 그 속에 가난한 시골청년의 아름다운 추억이 가득 담겨 있다 그 녹음기는 그후 입대를 하여서도 사관학교 내무반에 내 캐비넷속에 은밀히 숨겨져 남들이 다 잠든 깊은밤 이어폰을 통하여 사관생도의 고달픈 육신을 위무해준 정말 좋은 동무가 되었었다 그후 임관을 하고 전방생활하며 새로운 녹음기를 사게 되고 면세품 독수리표 전축에 밀리고 하던 와중에도 시골 고향의 방한켠에 어머니가 자식을 보듯 모셔 두었던 그 녹음기는 8년이란 세월이 흐른 79년 부산 광안리 어느곳에서 버려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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